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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중국의 사주 명리학이 전파된 것은 늦어도 고려시대 말일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중국 대륙과 한반도 간에는 각종 지식 및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들여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기록해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춘 한국 명리학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초기 명리학 역사

우리나라 문헌에 남아있는 사주명리학의 최초 기록은 1401년 조선왕조실록입니다. 명리학은 조선 초기부터 국가와 왕실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래 조선 건국 전 고려에는 서운관이라는 관청이 있어 천문, 역수, 측후, 각루 등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서운관은 조선 개국 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한양 천도,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 등의 공적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명리학 역사

 

이후 서운관은 세조 12년(1466)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고, 천문, 지리학, 측후(測候), 역수(曆數:책력) 등의 사무를 맡았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과거 시험에 명과학(命課學)이라는 분야를 두고 담당 관리를 선발했습니다. 특히 명과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한 명과학 훈도라는 관직을 두었습니다. 명과학 훈도는 명과학을 교육하던 일종의 교관으로, 운명과 길흉 등에 대한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초기에는 문신이 맡았으며, 그 뒤에는 기술관이 명과학 훈도로 임명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명과학훈도 2명을 두었으나, 1명을 역서 인쇄 과정을 감독하는 성경감인관(星經監印官)으로 바꾸면서 정원이 줄었습니다. 이 직책은 명과학을 공부한 사람 중 주부(主簿) 이상의 녹관직을 지낸 관원들로 선발했습니다.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명과학 생도들은 시험에 통과하면 관상감 참외(參外)의 체아직(遞兒職)에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명리학 쇠퇴

이처럼 명리학은 조선 초기부터 제도권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지닌 학문이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의 대표적 성리학자들도 명리학을 연구하고 관련 서적을 집필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 잡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역사의 부침을 겪게 되면서 일반인들과 명리학의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천체 관측

 

특히 명리학이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탄압하고 정기를 억압하기 위해 전통, 문화, 민속 등을 말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명리학을 단순히 점술 행위, 심지어 미신으로 치부하고 폄하했습니다.근대 주역의 대가 이달이 1919년 발간한 명리서 이후 약 30년간 사주명리학에 대한 저술은 없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1960년 초까지는 명리학의 암흑기로, 일제 우민화 정책의 여파가 남아있어 명리학이 사술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서양 문물과 사상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며, 단선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 체계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명리학은 미신 취급을 받으며 제도권 학문의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한국 명리학의 역사

 

현대 한국에서는 다시 자신의 운명과 사주팔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명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습니다. 명리학은 우주의 이치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파악하고 지혜를 체득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한국 명리학의 역사가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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